최한기는 전통을 넘어서려 한 조선 후기의 사상가였다19세기 조선은 내외부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다. 세도 정치로 인해 중앙 권력은 부패했고, 민중은 빈곤과 삼정의 문란에 시달렸다. 동시에 서양의 문물이 점차 유입되면서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조선의 보수적인 성리학 체제는 이를 포용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사상가가 바로 혜강 최한기였다. 그는 유교적 소양을 지닌 학자였지만, 기존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체계에 한계를 느끼고 실사구시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을 추구하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철학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과학, 지리학, 정치, 윤리, 심지어 경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포괄하며 조선에서 보기 드문 종합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최한기는 ‘기(氣)’를..
의병은 갑오개혁과 을미사변 이후 민중의 분노에서 시작되었다19세기 말 조선은 외세의 침탈과 내부 개혁 실패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특히 1894년의 갑오개혁은 일본의 강요에 의해 진행된 측면이 강했으며, 왕권 약화와 전통 질서의 붕괴를 초래했다. 이어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은 조선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극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바로 의병이었다. 초기의 의병은 유생과 양반 출신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충군애국의 사상을 바탕으로 왕실 수호와 외세 축출을 외쳤다. 1895년의 을미의병은 비교적 자발적이며 산발적인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일제의 지배에 대한 첫 조직적 저항의 불씨를 당겼다. 이들은 전..
지방 차별과 세도 정치가 봉기의 불씨가 되었다조선 후기, 특히 19세기 초에 이르러 조선 사회는 극심한 모순에 직면해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특정 세도가문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세도 정치가 만연했고,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탐관오리를 지방에 파견하며 민중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경제적으로는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곡의 부패—이 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하였고, 물가 상승과 기근, 전염병 등의 재해도 반복되며 민심은 점점 피폐해졌다. 여기에 지방차별 문제까지 더해졌다. 평안도 지역은 조선 중앙 권력으로부터 지속적인 차별을 받아왔으며, 과거 시험 응시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이 같은 불평등은 지방 지식인과 하층민들의 분노를 증폭시켰고, 이러한 상황에서 평안도 양..
명과 후금 사이에서 외교의 줄타기를 하던 조선은 결국 전쟁을 맞았다17세기 초반, 조선은 외교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조선의 외교 중심축이었던 명나라가 쇠퇴하고, 만주 지역에서는 새로운 강국인 후금이 급속히 부상하면서 조선은 양국 사이에서 신중한 외교 전략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명에 대한 '사대' 의식을 고수하며 후금을 경시하는 태도를 유지했고, 이는 결국 후금의 반발을 불러왔다. 1627년 정묘호란을 통해 조선은 후금의 군사력을 체감했으나, 일시적인 화의에 불과했고, 이후에도 조선은 명과의 관계 회복에 집중하면서 후금의 경고를 무시했다. 특히 인조와 집권층은 후금을 오랑캐로 여기고 군신 관계 수립 요구를 거절하며 명에 병력을 파견하는 등 후금의 심기를 거스르는 ..
식민지 체제는 여성에게 이중의 억압을 가했다일제강점기 조선 여성은 식민지 지배와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구조 속에서 극심한 억압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경제적 자원지로 삼았고, 동시에 조선 사회의 전통적 성 역할 구조를 강화시켜 식민지 통치를 더욱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했다.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으며, 교육의 기회조차 제한적이었다. 여학교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일본 제국의 어머니’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또한 여성 노동자들은 방직공장, 성냥공장, 가내수공업 등에 동원되었으나,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극히 제한되었고, 그들의 존재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희생적 어머니 혹은 조용한 아내..
3·1운동의 거대한 물결은 망명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1919년 3·1운동은 조선 전역에 독립의지를 일깨운 역사적 사건이었다.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독립을 외쳤고, 이는 단순한 항의 시위를 넘어 전 민족적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의 결과로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은 하나의 정치적 구심점을 만들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결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이 조직되었고, 대통령제 형태로 이승만이 국무총리 겸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가 이후 내각 책임제 등 다양한 체제를 거치며 임시정부는 조선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상하이를 거점으로 한 임시정부는 각 지역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고, 전 세계에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외교 중심기구로 기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