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직전의 왕권 회복을 위해 대원군은 강력한 개혁과 통제를 시도하였다19세기 중반 조선은 내외의 혼란 속에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민란과 기근, 삼정의 문란으로 민심은 이반되었고, 왕실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하 대원군)이 섭정의 자리에 오르며,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과 왕권 회복을 목표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원군은 먼저 비대해진 세도 가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붕당 정치를 타파하며 정치 기강을 바로잡는 데 주력했다. 특히 안동 김씨 등 세도 가문 출신 인사들을 제거하고, 인재를 신분에 관계없이 등용하는 탕평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대동법의 시행을 강화하고, ..
봉건 질서와 외세 침탈 속에서 동학은 민중의 절박한 호소로 태어났다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양반 지배층의 부패와 수탈이 극심했고, 토지의 편중과 삼정의 문란은 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영향력이 조선을 압박하며 전통적인 세계관을 흔들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등장한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민중의 절박한 호소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열망이 결합된 사상 운동이었다. 최제우는 1860년 동학을 창도하며, 하늘에서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고, ‘시천주(侍天主)’ 즉 하늘을 모신다는 개념을 중심으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는 유교적 위계 질서와 신분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
정약전은 유배라는 제약 속에서 자연과 백성의 삶에 깊이 다가갔다정약전(1758~1816)은 정약용의 형이자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신유박해 이후 흑산도로 유배되어 남긴 『자산어보』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형제인 정약용과 함께 실학적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은 지식인이었으나 자연과학적 관심과 관찰을 토대로 실증적 지식을 체계화한 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흑산도 유배는 그에게 정치적 좌절이었지만 동시에 생태와 민중 생활을 깊이 관찰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는 단순히 물고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섬 주민들과 어민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산 생물의 특징, 서식지, 채집 방식, 조리법 등 실생활에 기반한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록하였다. 이는 단순한 과학적 관찰을 넘어서 백성과 자연에..
정약용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 유교 이념을 현실 개혁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로, 당시 사회 구조의 모순과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안을 제시한 지성인이었다. 그는 성호 이익과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보다 체계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식으로 사회 개혁을 이론화하였다. 당시 조선은 양반 중심의 사회 체제와 부패한 관료제, 토지의 불균형 분배, 불합리한 세금 제도 등으로 인해 농민과 중하층 민의 삶이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정약용은 이와 같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유교적 이상을 바탕으로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는 유교의 경전과 제도를 철저히 분석하며, 그 속에서 이상적인 통치를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도출하였다. 정약용의 사상은 단순한 이..
사회 현실에 눈뜨기 시작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문제의식에서 실학은 출발했다조선 후기에 접어들며 사회 구조는 다양한 모순과 병폐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농민의 피폐, 지주의 토지 독점, 상공업의 발전 억제 등 기존의 성리학 이념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실 문제가 누적되자, 일부 지식인들은 유교의 고전적 해석에서 벗어나 현실에 바탕을 둔 새로운 학문적 시각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태동한 것이 바로 실학이다. 실학은 말 그대로 ‘실용적 학문’을 지향하며, 당대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의 부강을 이끌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려는 사상적 흐름이었다. 이들은 교조적 성리학을 비판하고,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 상업과 기술, 과학을 중시하였으며,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정책과 제도..
병자호란 이후 조선 지식인 사회는 명에 대한 충절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병자호란이라는 굴욕적인 전쟁을 겪은 조선 사회는 깊은 충격에 빠졌고, 이로 인해 국가적 자존심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고조되었다. 특히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사회는 청에 굴복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 청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는 논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북벌론이 등장하였으며, 이는 단순한 군사적 계획을 넘어 국가의 정체성과 도덕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효종은 즉위 후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계열 유학자들은 이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들은 청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조선이 중화 문명을 계승한 유일한 국가임을 강조하면서 복수와 정의의 이름으로 북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