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나간 조선인들은 새로운 공간에서 민족운동의 씨앗이 되었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압박,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국외로 이주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생계형 이주가 중심이었지만, 곧이어 망명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해외 공간이 전환되었다. 만주, 연해주, 중국, 일본, 미국, 멕시코, 하와이 등지에는 다양한 이유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정착했으며, 이들은 단순한 이민자의 범주를 넘어 민족운동의 주요 주체로 변모해갔다. 특히 만주와 연해주는 조선과의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무장투쟁과 독립군 양성의 전진기지가 되었고, 상하이와 미국은 외교와 자금 모금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들 해외 조선인들은 ‘디아스포라’라는 말로 통칭되며, 국경 너머에서 민족 정체..
분열된 민족 운동 세력은 통합의 필요성에 직면했다1920년대 후반, 조선의 독립운동 진영은 심각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나는 무장 투쟁을 중시하는 민족주의 계열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조직적 대중운동을 강조하는 세력이었다. 이 둘은 목표는 같지만 방법과 이념에서 충돌을 거듭했고, 일제의 문화통치 전략은 이러한 분열을 교묘히 이용하며 민족 운동의 약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양 진영 모두 독립을 위해서는 통합된 목소리와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에 인식이 일치하게 되었고, 이는 좌우 합작이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27년 2월, 서울에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신간회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각성’, ‘일체 민족운동의 단결’, ..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의 조직적 준비와 일본군의 오만이 충돌한 결과였다1920년 10월, 간도 지역은 조선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현장이었다. 이는 같은 해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이 조선 독립군을 일망타진하고자 벌인 ‘경신참변’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홍범도 부대 등 여러 무장 독립군이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운 대규모 전투였다. 일본군은 수천 명에 달하는 병력과 중화기를 앞세워 독립군을 섬멸하려 했지만, 독립군은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과 기습 작전을 통해 그들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청산리 일대의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등지에서 벌어진 이 연속 전투는 6일간 지속되었고, 독립군은 적은..
3·1운동 이후 일본은 무단통치를 포기한 듯 보였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1919년 3·1운동은 일본 제국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민중의 자발적이고 광범위한 항쟁은 무단통치의 한계를 드러냈고, 국제 사회 역시 조선의 독립 열망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의 비판과 국제 여론은 일본이 식민 지배 방식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는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통치 전략을 변경하게 되었고, 이를 흔히 '문화통치'라 부른다. 표면적으로는 무단통치를 철회하고 언론·출판·집회·교육에 일정 부분 자유를 부여하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또한 헌병 경찰 중심이었던 통치 구조를 보통 경찰 중심으로 전환하고, 일본인 총독 대신 민간인 출신의 총독도 임명 가능하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그러나..
의열단은 무력 투쟁을 통해 일제의 심장을 겨누고자 했다1919년 3·1운동의 실패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평화적 수단의 한계를 실감하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무장 투쟁과 직접 행동을 통한 독립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같은 해 11월 중국 지린성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직이 바로 의열단이다. 의열단은 기존의 독립운동 방식과는 달리,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 인물과 기관을 정조준하는 과감한 투쟁 노선을 선택했다. 단원들은 ‘민중 속에서 일어나 민중과 함께 죽는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생명을 걸고 투쟁에 임했다. 의열단은 테러라는 방법이 갖는 도덕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목표성과 상징성을 바탕으로 일제의 통치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이들은 민족의 분노를 행동으로 보여주..
국내외 상황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했다1919년 3월 1일, 조선 전역에서 일제 식민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선언하는 대규모 비폭력 항쟁인 3·1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발단은 단순히 일제의 억압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제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함으로써, 식민지 민족들에게도 자결의 권리가 있다는 기대가 퍼졌다. 국내적으로는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와 그 장례를 앞둔 시점에서 민중의 울분이 고조되었고, 동시에 지식인·종교인·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조직적 움직임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 지도자들과 학생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며, 33인의 민족대표가 서명함으로써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