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군역제는 양반과 농민의 명확한 역할 분담에 기반한 체계였다
조선 전기는 중앙집권적 질서를 강화하면서 군역제도를 통해 병력과 세입을 동시에 확보하고자 했다. 특히 태종과 세종 시기를 거치며 시행된 양인개병제는 모든 양인이 병역 의무를 지니는 제도로, 형식상으로는 신분을 막론하고 일정한 연령과 조건을 갖춘 남성이라면 병역에 복무해야 했다. 이러한 제도는 성리학적 유교 이념 아래서 군역을 공적 의무로 여기는 가치관과 결합되어,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명분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양반 신분층이 군역을 회피하거나 대리인을 통해 면제받는 일이 일반화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농민과 중인 계층이 실질적인 군사력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의 군역은 지역 방어와 수도 수비, 그리고 지방 군현의 자위 체계를 유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조선 초기 사회의 신분 질서를 고정시키는 장치로 작용했다. 국가의 군사력은 평민의 희생 위에 세워졌고, 이는 향후 사회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군역제는 붕괴하고 대체 제도가 등장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회는 군사적 위기와 인구 변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군역제도의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되었다. 특히 전란 이후 농민들이 대거 이탈하거나 몰락함에 따라 병역 자원 확보가 어려워졌고, 이에 따라 정부는 병역 의무를 금납화하는 방안을 확대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등장한 것이 바로 '군포'라는 납세 방식이다. 일정한 연령대의 남성에게 포(布)나 쌀, 혹은 화폐로 대체 납부하게 함으로써 병역 의무를 대신하도록 한 것이다. 이 제도는 행정적으로는 간편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사력을 현저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병역의 대가로 받은 세금은 용병이나 별도의 군사 조직 운영에 사용되었으나, 이는 정규 군사 체계를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조선 후기 군사 체계의 약화를 불러왔다. 또한 군포 제도는 중산층 이하 서민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양반층은 여전히 면역 특권을 누리며 사회적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이로 인해 군역제는 점차 고착된 신분제 구조 속에서 차별과 부당함을 고발하는 대표적 제도로 전락하였다.
군역제의 변화는 조선 사회의 신분 구조와 재정 운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군역제는 단순한 병력 확보 체제를 넘어 국가 운영과 사회 질서 유지의 핵심 기제 중 하나였다. 전기에는 유교적 질서에 입각한 의무와 권리의 균형이 강조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균형은 점차 무너졌다. 군포 납부로 병역이 대체되면서 국가는 군사력을 점차 용병이나 지방 훈련도로 대체하게 되었고, 이는 국방력의 취약화로 이어졌다. 동시에 국가 재정도 병역세금에 의존하게 되면서 수입 구조의 왜곡이 심화되었고, 백성들 사이에 불만이 누적되었다. 특히 양반층이 군역을 회피하는 반면, 중인과 상민, 심지어 천민까지도 병역세의 부담을 지게 되면서 신분 간 갈등은 격화되었고, 이는 향후 조선 말기 사회 개혁 요구의 밑거름이 되었다. 결국 군역제의 변화는 단순한 병역 시스템의 수정이 아닌, 조선 후기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반영하고 재편하는 중요한 지표로 작용했으며, 국가 통치의 방향과 민중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제도적 전환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