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탄생한 조선의 과거제도는 관료 등용의 기본 틀이었다
조선은 고려 말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국가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유교적 이념을 기반으로 한 통치 체계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때 그 핵심 장치로 작동한 것이 바로 과거제도였다. 과거는 문관을 양성하는 문과와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 그리고 기술관을 뽑는 잡과로 나뉘며, 특히 문과는 유교 경전의 해석과 문장력을 중심으로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과거제도는 사대부 양성과 정치 참여의 통로로 기능하면서, 명분과 덕목을 중시하는 조선의 성리학 국가 이념을 실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은 성종 대부터 과거제도를 정비하여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험을 시행하고, 합격자 명단을 홍패로 공표하며 엄격한 절차를 유지했다. 이는 단순히 인재를 뽑는 수단을 넘어서, 관료 체계의 정당성과 정치 질서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기제로 작용했으며, 국가가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고 공정한 경쟁을 제도화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과거제도는 양반 계층의 진입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신분 고착화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겉보기에 과거제도는 실력과 학문을 통해 누구나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열린 구조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생원이나 진사로서 소과에 합격하거나, 향교나 서원에서 정규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이는 곧 일정한 경제력과 사회적 기반을 갖춘 양반층에게만 실질적으로 허용되는 구조였다. 중인이나 평민 계층이 과거에 합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응시 자체가 제한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과거제도는 양반 가문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후손에게도 관직의 기회를 세습하듯 넘겨줄 수 있는 장치로 기능했다. 과거를 치르는 비용과 교육 환경,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과 향약의 지원 등은 모두 양반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제도는 명목상 능력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계층 간 진입 장벽을 강화하고 양반 중심의 사회 질서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와 같은 제도의 이중성은 조선 후기 들어 사회적 불만과 신분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며 변화를 촉구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제도는 변질되고 그 기능을 상실해갔다
17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양반 인구의 증가와 함께 과거 응시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시험의 난이도는 올라가고 합격률은 점점 낮아졌다. 동시에 일부 부유한 가문은 과거를 위한 교육을 전문적으로 준비하는 사설 교육 기관을 운영하거나, 대가를 주고 답안을 작성하는 등 부정행위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이는 과거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고, 시험이 권력의 통로가 아니라 특권의 상징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시류에 따라 정권이 바뀌면서 과거 출제 경향이 정치적으로 편향되기도 했고, 일부 붕당은 자신들의 인재만 등용하기 위해 시험을 조작하거나 폐지하는 극단적 조치까지 단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과거제도의 효율성과 정당성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으며, 결국 고종 대에는 과거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인재 등용 방식으로 근대 교육과 시험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과거제도는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시험제도로, 능력주의와 신분제가 충돌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려 했던 역사적 실험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