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의 등장은 고조선의 외부 세력 수용과 권력 재편의 결과였다
위만조선은 기원전 2세기 초, 고조선의 준왕이 축출되고 위만이 새롭게 정권을 장악하면서 성립된 국가로, 이는 단순한 쿠데타나 정권 교체가 아니라 당대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복잡한 흐름과 밀접히 관련된 사건이었다. 위만은 본래 중국 연나라에서 온 망명자였으며, 수천 명의 유민을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와 서방 변경 지역을 통치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당시 고조선은 점차 성장하던 한(漢)나라와 접촉하고 있었고, 동북아시아 일대에서는 유목 세력, 중국계 유민, 토착 세력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위만은 뛰어난 군사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며, 위만조선을 세운다. 그는 이후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 일대를 장악하며 강력한 통치 체제를 구축하고, 북방 세력 및 중국 세력과의 교역로를 장악하여 고조선의 국력을 확장시켰다. 위만조선의 성립은 외래 세력이 토착 국가에 흡수되거나 융합되어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낸 고대 한반도의 유연한 권력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위만조선은 한과의 갈등 속에서 국제 교역과 외교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위만조선은 단순히 한 지역을 통치하는 고립된 세력이 아니라, 당시 동북아 국제 질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세력이었다. 특히 위만조선은 중국 한나라와 흉노, 남방의 예맥 등 다양한 세력과의 외교 관계를 조율하면서 교역로를 통제하고 중계 무역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위만조선은 한나라의 경제적 이익을 일정 부분 차단하거나 독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는 양국 간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한나라 무제는 이러한 위만조선의 존재를 위협으로 인식하였고, 결국 기원전 109년부터 본격적인 침공을 단행하게 된다. 전쟁은 1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위만조선은 왕검성에서 최후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기원전 108년 멸망하게 된다. 이 전쟁은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교역로와 경제권, 그리고 문화적 지배권을 둘러싼 전략적 충돌이었으며, 위만조선이 고조선의 고유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국제 교류에 적극 참여했던 다면적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위만조선은 이후 고조선의 역사적 단절이 아닌, 새로운 역사 주체로 이어지는 한사군 설치와 고대 국가 형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위만조선의 멸망은 한사군 설치와 고대 국가 형성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위만조선이 한 무제에 의해 멸망하면서, 고조선의 영토에는 한사군이라는 중국식 행정 조직이 설치되었다. 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이 중국 중앙정부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된 최초의 사례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등 네 개의 군이 설치되어 지역 통치와 교역, 문화 전파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특히 낙랑군은 오랫동안 존재하며, 한반도 고대 사회에 중국 문물을 전파하는 중요한 통로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는 토착 세력들이 새로운 권력 중심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한사군의 통치에 저항하거나,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들은 이후 고구려, 부여, 옥저, 동예 등으로 이어지는 여러 정치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위만조선의 멸망은 단지 하나의 국가가 사라진 사건이 아니라, 한반도가 외세의 지배와 토착 세력의 독자적 발전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시작한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이처럼 위만조선은 고조선 후기의 국제적 성격, 국가 구조의 이중성, 그리고 이후 한반도 고대 국가 형성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