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형적 시간 개념의 도입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역사를 기술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단순히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전통 사회에서 시간은 순환적이거나 자연 중심의 리듬에 따라 흘러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농경 사회에서는 계절의 변화가 생활을 이끌었고, 우주의 운행은 인간의 삶에 반복성과 조화를 부여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서구의 과학기술과 역사 인식이 동아시아에 유입되면서, 시간은 더 이상 순환적이지 않고 직선적으로, 진보와 발전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사상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 인식의 전환이었다. 선형적 시간은 과거를 단순한 전범이 아닌 ‘극복해야 할 시대’로, 미래를 ‘계획하고 건설할 대상’으로 만들어 주었고, 이는 곧 근대적 역사학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연대기적 서술 방식은 근대적 역사학의 핵심 도구가 되었다
근대적 시간관은 역사서술 방식의 변화로 직결되었다. 편년체와는 구분되는 연대기적 서술은 사건을 단지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인과관계 속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를 포함한다. 특히 19세기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한 역사학자들은 인간 활동의 목적성과 시대정신을 강조하며, 특정 시대가 이전보다 나아졌는지를 따지는 방식으로 서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서술법은 자연히 '과거-현재-미래'의 일직선적 구도를 강화하며, 역사는 단절보다는 축적의 연속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나 개화기의 지식인들 역시 이러한 시간 개념의 영향을 받았다. 연암 박지원이나 유길준, 박은식, 신채호 등의 역사 인식 속에는 더 이상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는 역사가 아닌, 인간의 선택과 책임이 작용하는 역사관이 등장한다. 이처럼 근대적 시간은 근대적 주체를 전제로 하는 역사 이해의 토대를 제공한 셈이다.
현대 역사학의 토대는 시간의 구조화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역사'라는 학문은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근대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 연대 측정 기술의 발달, 고고학과 문헌학의 결합, 연대표 작성과 같은 도구들은 모두 시간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의 산물이다. 과거를 정확히 기록하고, 그것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하며, 미래에 대한 통찰까지 제공하는 역사학은 시간의 구조화를 통해 가능해졌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려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를 이해하고 사회적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로까지 확대되었다. 즉, 근대적 시간관은 역사학의 도구이자 동시에 목표가 된 것이다. 이처럼 시간의 선형성은 근대 이후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 틀이 되었으며, 역사학은 그 중심에서 현실과 과거, 미래를 연결짓는 지적 활동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곧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근본 질문에 응답하려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인식의 진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