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역사와 집단 기억은 서로 다른 층위의 과거를 말한다
역사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점에서 해석되고 재구성된 이야기다. 이와 달리 기억은 개인이나 집단이 체험한 감정과 인상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때로는 사실보다는 감정과 상징에 의존한다. 공식 역사와 집단 기억은 같은 사건을 두고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전쟁은 국가 차원에서는 ‘영광의 승리’로 기억되지만, 그 전쟁에 징집되었던 개인에게는 ‘생존의 악몽’으로 남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역사 서술과 기억의 정치가 충돌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특히 근현대에 들어서는 전쟁, 학살, 식민 지배 등의 민감한 사건에서 이러한 충돌이 더욱 두드러지며, 공식적인 역사 서술이 배제한 기억들이 문학, 예술, 증언 등을 통해 새로운 역사 인식을 요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묻는다. 과거를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 있으며, 누가 침묵을 강요당했는가?
기억의 정치와 침묵의 구조는 역사 서술의 한계를 드러낸다
역사는 언제나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 특정 집단의 기억은 공적 영역에서 존중받는 반면, 다른 집단의 기억은 비가시화되거나 지워진다. 이는 민족, 성별, 계급, 지역 등에 따라 달라지며, 특히 식민주의나 독재 체제 하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억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한동안 ‘폭동’이라는 왜곡된 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침묵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의도된 배제와 왜곡의 결과다. 기억을 말할 수 있는 조건은 사회적 권력에 의해 결정되며, 공적 기억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공감이 요구된다. 이처럼 역사는 항상 ‘기억할 것’과 ‘잊을 것’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구성되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지워지거나 왜곡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역사학은 단지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억눌린 기억을 회복하고 다층적인 목소리를 드러내는 윤리적 실천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양한 기억을 포용하는 역사학이 민주주의를 지탱한다
기억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은 단순한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핵심 과제다. 한 사회가 특정한 기억만을 강조하고 나머지를 억압한다면, 그 사회는 결국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하게 된다. 반대로 서로 다른 기억들이 공존하고, 충돌하더라도 이를 표현하고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 사회는 보다 건강한 역사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역사학은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인 동시에, 현재의 갈등을 해소하고 미래의 공존을 위한 발판이 된다. 진정한 역사 서술은 하나의 기억을 정답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억을 통합하고 질문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누가 과거를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곧 우리 사회가 어떤 기억을 중심에 두고, 어떤 목소리를 주변부로 밀어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역사는 단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