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연구의 식민주의적 왜곡에 맞서 백남운은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역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왜곡되었다. 이른바 식민사관은 조선이 자생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외부의 힘에 의해 끌려 다닌 수동적 존재로 묘사하며, 일제의 통치를 문명화 사명으로 포장하였다. 이러한 역사 해석에 맞서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사회경제사학을 통해 조선사의 독자적 발전 가능성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는 조선 역시 보편적인 역사 발전 단계를 밟아 왔으며, 원시공동체 → 노예제 → 봉건제라는 구조 속에서 사회경제적 변화가 꾸준히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조선이 '정체된 사회'라는 식민사학의 핵심 논리를 부정하는 동시에, 역사 발전의 보편성을 조선사에 적용함으로써 민족사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시도였다. 백남운은 당시 일제가 주도하던 학계의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는 이후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회경제사학은 구조와 계급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했다
백남운의 사회경제사학은 전통적인 정치 중심 서술에서 벗어나, 생산양식과 계급관계의 변화에 주목하였다. 그는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조선사회경제사』 등의 저술에서 조선의 봉건제 구조를 분석하고, 농민과 토지, 국가 권력 간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선이 전근대적 봉건사회를 충분히 발전시켰으며, 이는 자본주의로 이행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양반 계층의 경제적 기반, 농민의 생산력, 그리고 전세제도의 변화 등을 근거로 삼아 역사 발전을 경제 구조의 변동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단순히 정치사 중심의 연대기적 역사 이해에서 벗어나, 보다 입체적이고 과학적인 역사 해석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역사학이 사회과학적 분석틀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백남운은 계급투쟁과 사회구조의 변화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민중의 존재와 역할을 역사 서술의 중심에 놓았고, 이는 이후 민중사학, 실증사학 등 다양한 흐름으로 확산되었다.
백남운의 사학은 해방 이후 민족사 서술의 주류가 되었다
광복 이후 백남운의 사회경제사학은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특히 해방 공간에서 그는 조선공산당의 문화부 책임자로 활동하며 역사학뿐 아니라 교육, 언론, 정치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개혁을 시도하였다. 그의 학문적 영향력은 1960~70년대에도 이어졌으며, 그의 제자들은 사회경제사학의 전통을 계승해 한국 근대사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물론 냉전 체제와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화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은 학문적 탄압과 검열의 대상이 되었고, 백남운 자신도 정치적으로 불운한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단지 이념적 주장에 머무르지 않고, 조선사의 발전 가능성과 민중 주체성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오늘날에도 백남운의 사회경제사학은 식민사관의 유산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역사학이 갖추어야 할 분석력과 비판 정신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그는 한국 근현대 역사학이 정치적 선전이나 단순한 과거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현실과 구조적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비판적 학문이 되어야 함을 보여준 대표적 사상가였으며,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한 지적 자산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