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체제는 여성에게 이중의 억압을 가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은 식민지 지배와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구조 속에서 극심한 억압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경제적 자원지로 삼았고, 동시에 조선 사회의 전통적 성 역할 구조를 강화시켜 식민지 통치를 더욱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했다.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으며, 교육의 기회조차 제한적이었다. 여학교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일본 제국의 어머니’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또한 여성 노동자들은 방직공장, 성냥공장, 가내수공업 등에 동원되었으나,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극히 제한되었고, 그들의 존재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희생적 어머니 혹은 조용한 아내로 고정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조선 여성들의 삶을 깊은 침묵과 억눌림 속에 가두었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깨어나는 의식의 싹도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여성 계몽운동과 사회 참여는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선 여성들 사이에서도 근대적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육을 받은 일부 여성들은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여성도 민족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대표적인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는 1927년에 창립되어 계몽, 교육, 빈민 구호, 언론 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근우회는 좌우 합작 단체로서 여성의 권리 향상뿐 아니라 민족 독립이라는 대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여학생 야학 운영, 여성 잡지 발간, 공장 여성노동자 지원 등 실질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신여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일부 여성들은 한복 대신 양장을 입고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등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여성상과 일제 식민 이데올로기에 동시에 도전하는 행위였으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변화는 소수의 운동에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조선 여성의 삶에 작지만 뚜렷한 균열을 만들어냈다. 신문, 잡지 등 언론매체에서도 여성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여성 문학 또한 사회 비판의 도구로 등장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앞장서서 조국과 자유를 외쳤다
여성은 독립운동에서도 결코 주변적 존재가 아니었다. 3·1운동에서 유관순이 보여준 저항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여성들의 적극적 정치 참여를 대표하는 사건이었다. 유관순을 비롯해 권애라, 남자현, 박자혜, 정정화, 박차정 등 수많은 여성들이 국내외에서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남자현은 중국에서 무장 독립군의 자금을 지원하고, 일본 고관 암살 시도를 감행하는 등 전투적 활동을 벌였고, 박차정은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하며 민족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이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감옥과 고문, 생사의 위협 속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으며, 당대의 성별 장벽을 넘어선 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임시정부 내에서는 여성들이 연락, 간호, 행정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떠받쳤다. 그들의 활동은 종종 남성 위주의 독립운동 서사 속에서 축소되거나 잊혀졌지만, 최근 재조명을 통해 그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다. 여성의 저항은 단지 민족의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성 자신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식민지와 가부장제를 동시에 겨누었던 그들의 목소리는 한국 근대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며,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