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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의 창립과 활동 - 좌우 합작 민족운동의 상징

by HomeCareHacks 2025. 8. 21.

분열된 민족 운동 세력은 통합의 필요성에 직면했다

1920년대 후반, 조선의 독립운동 진영은 심각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나는 무장 투쟁을 중시하는 민족주의 계열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조직적 대중운동을 강조하는 세력이었다. 이 둘은 목표는 같지만 방법과 이념에서 충돌을 거듭했고, 일제의 문화통치 전략은 이러한 분열을 교묘히 이용하며 민족 운동의 약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양 진영 모두 독립을 위해서는 통합된 목소리와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에 인식이 일치하게 되었고, 이는 좌우 합작이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27년 2월, 서울에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신간회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각성’, ‘일체 민족운동의 단결’, ‘일체 기회주의 부인의 정신’이라는 세 가지 강령 아래 출범한 전민족적 대중운동 조직이었다. 창립 당시 주요 인사로는 민족주의 계열의 이상재, 홍명희, 안재홍과 사회주의 계열의 김단야, 허헌 등이 참여하였으며, 이는 명실상부한 좌우 통일의 실현으로 평가받았다.

신간회는 전국적인 조직망과 대중운동을 통해 항일의식을 고양시켰다

신간회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조직의 규모와 활동의 광범위함에 있었다. 창립 이후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립하며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나갔고, 창립 1년 만에 100여 개 지회와 수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게 된다. 신간회는 연설회, 강연회, 시국강좌, 야학 등을 통해 민중의 계몽과 민족의식 고양에 힘썼으며, 특히 농민과 노동자, 청년,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조직화와 교육에 집중하였다. 언론과 출판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어 항일 담론을 공론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대응을 통해 대중 속에서 신뢰를 쌓아갔다. 대표적인 활동 중 하나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지지와 전국적인 확산 시도였다. 이 사건은 일제 식민 교육과 민족 차별에 항거한 학생들의 운동이었고, 신간회는 이를 조직적으로 지원하며 조선 전역에 항일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선전 차원을 넘어 조선 민중이 직접 행동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신간회는 항일운동의 대중화와 조직화를 대표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념의 벽을 넘은 통합 운동은 한계와 의미를 동시에 남겼다

신간회는 1931년 자진 해소되기까지 불과 4년 남짓한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조선 민족운동사에서 매우 큰 족적을 남겼다. 그 해소의 배경에는 일제의 탄압과 감시, 내부 이념 갈등, 그리고 국제 정세의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사회주의 계열이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합법 운동을 부정하고 지하 투쟁으로 전환하게 되면서 조직 내 균열이 생기게 되었고, 민족주의 진영과의 연대는 한계에 부딪혔다. 그러나 신간회는 분열과 갈등이 지배적이었던 1920년대 후반 조선 사회에서 좌우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협력할 수 있음을 보여준 보기 드문 사례였다. 이 통합은 이후 광복 이후 좌우 합작 정부 수립 논의나 통일 운동의 기반적 사상으로도 계승되었으며, 일제하에서도 민족 전체가 하나 되어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실현한 조직이었다. 또한 신간회의 활동은 단순히 정치적 투쟁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조선인의 의식을 일깨우고 새로운 세대를 준비시키는 교육적·문화적 성과를 남겼다. 오늘날 신간회는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운동의 뿌리로 재조명되고 있으며, 이념을 초월한 연대와 협력의 가능성을 역사 속에서 증명해낸 조직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