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일본은 무단통치를 포기한 듯 보였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은 일본 제국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민중의 자발적이고 광범위한 항쟁은 무단통치의 한계를 드러냈고, 국제 사회 역시 조선의 독립 열망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의 비판과 국제 여론은 일본이 식민 지배 방식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는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통치 전략을 변경하게 되었고, 이를 흔히 '문화통치'라 부른다. 표면적으로는 무단통치를 철회하고 언론·출판·집회·교육에 일정 부분 자유를 부여하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또한 헌병 경찰 중심이었던 통치 구조를 보통 경찰 중심으로 전환하고, 일본인 총독 대신 민간인 출신의 총독도 임명 가능하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민족운동을 더욱 은밀하고 효율적으로 억누르기 위한 통제 방식이었으며, 문화통치는 오히려 더 정교하고 체계적인 식민지 지배의 틀이 되었다. 일본은 겉으로는 ‘문명화된 통치’를 표방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정신과 문화를 일본 제국에 동화시키려는 야심을 더 공고히 해나갔다.
언론과 교육의 제한적 허용은 감시와 조작을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문화통치 하에서 일부 조선어 신문이 창간되었고, 교육기관이 확충되면서 겉보기에는 조선인의 자율성이 확대된 듯 보였다. 실제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각각 1920년에 창간되었고, 이를 통해 조선인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기사와 문학 작품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철저한 검열 체계 속에서만 허용된 것이며, 조금이라도 반일적이거나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내용은 삭제되거나 폐간 조치를 당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교육 역시 조선인의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초등 교육에서 일본어는 필수였고, 조선어는 선택 또는 부차적인 과목으로 전락하였다. 중등 이상 교육에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 중심의 교과서가 사용되었고, 조선사는 축소·왜곡되거나 아예 다루어지지 않기도 했다. 특히 교사와 교육 행정직은 대부분 일본인으로 채워졌으며, 조선인 지식인 양성을 통한 민족 자각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반영되었다. 이처럼 언론과 교육은 조선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체제 순응적 민중을 길러내기 위한 도구로 작동했다.
문화통치는 민족 말살의 정교한 전략이었으며 저항은 계속되었다
문화통치는 무력 대신 사상과 제도를 통해 조선인을 통제하는 전략이었다. 겉으로는 유화 정책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족 말살 정책의 전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전개된 황민화 정책과 내선일체 사상이 그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는 곧 조선인의 일본인화라는 최종 목표를 향한 사전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조선 민중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비밀결사와 독립운동 조직들은 더욱 은밀하게 활동하며 일본의 감시망을 피했다. 문학, 미술, 음악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민족 정체성과 해방 의식을 담은 작품들이 창작되었고, 이는 조선인의 정신적 저항의 한 형태로 작용하였다. 특히 신간회 같은 민족 유일당 운동은 좌우를 막론한 연대를 바탕으로 일본의 문화통치에 조직적으로 대응하려 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통치는 일제 식민 지배의 ‘진화된 형태’였을 뿐, 식민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았으며, 조선인의 자각과 저항 또한 보다 다양하고 깊이 있게 발전해 나갔다. 오늘날 문화통치를 단순한 유화 정책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제의 전략을 지나치게 순화하는 시각이며, 그 실체를 정확히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