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망명 속에서 피어난 독립의 의지

by HomeCareHacks 2025. 8. 21.

3·1운동 이후 민족대표들은 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모색했다

1919년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은 단순한 항쟁을 넘어 조선 민중의 독립 의지가 뚜렷하게 표출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본의 무력 탄압으로 인해 점차 수그러들었고, 현실적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보다 조직적인 정치 체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조선 민중의 의사를 대표하고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을 천명할 수 있는 임시정부 수립을 모색하게 된다. 서울에서는 한성정부가,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그리고 상하이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각각 임시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분산된 지도체제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논의가 곧 시작되었고, 그 결과 1919년 9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로, ‘민주공화제’를 국체로 명시하며 민의에 기반한 국가를 지향하였다. 대통령제로 출범한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임명되었다. 이로써 독립운동은 무장 항쟁을 넘어 외교, 정치, 교육 등 종합적 국가 운영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외교, 군사, 교육 등 다양한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이동과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운동의 중심 조직으로 기능하였다.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외교 활동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으며, 미국, 중국, 소련 등지에도 외교대표를 보내는 등 광범위한 외교전을 벌였다. 동시에 국내외의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직접 주도하기도 했다. 특히 1920년대에는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등과 연계하여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등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통해 무장 항쟁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임시정부는 국무원 산하에 다양한 부처를 두고 교육, 재정, 통신, 보건 등 각 부문에서 국가 기능을 수행하고자 했다.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운동가들은 각국의 한인 사회와도 긴밀히 연계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군자금을 모으며,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 운동도 펼쳤다. 이 모든 활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지속되었으며, 조선이 단순한 저항세력이 아닌 ‘나라를 세우려는 주체’임을 보여주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방 후 정부 수립의 정통성과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활동은 단지 망명지에서의 저항에 머무르지 않았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이 격화되고 중국 본토도 중일전쟁으로 혼란스러워지면서,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전전하다가 최종적으로 충칭에 정착하였다. 충칭시기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체제 하에서 보다 정비된 형태로 재편되었고, 광복군 창설과 국내 진공작전 계획 등 무장 투쟁의 중심체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연합국에 조선의 참여를 천명하고, 대한민국 광복군을 통해 일본에 선전포고까지 하면서 독립전쟁의 주체로서 국제적 입지를 다졌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곧바로 정식 정부로 승계되지 못했지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있어 역사적 정통성과 헌법적 기원을 제공하였다. 헌법 전문에도 명시되었듯이,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국가이며, 그 활동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뿌리로 인식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한 정부였으며, 민족 자주와 공화주의 정신이 현실 정치로 구현되기까지 끈질기게 항거하고 준비해온 독립운동의 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