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제국 선포와 함께 근대 국가 체제로의 개혁을 본격화하였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조선 왕조 체제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제국의 수립은 단순한 국호 변경이 아닌, 제국주의적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이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명확히 하고자 한 선언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종은 ‘광무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전방위적인 국가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은 정치, 경제, 군사, 산업,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근대 국가의 기본 구조를 정비하려는 노력이었다.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강화를 위한 관제 개편과 함께, 근대적 재정 제도를 도입하고, 근위대와 진위대를 중심으로 군제 개편을 단행하였다. 또한 토지 조사 사업을 추진하여 국가의 조세 기반을 정비하고, 산업을 장려하기 위한 상공업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무개혁은 고종이 주도한 유일한 근대화 시도로, 외세에 기대지 않고 자주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개화 시도들과 구별된다.
광무개혁은 제도적 개편을 넘어서 사회 전반에 근대화의 기초를 다지려 했다
광무개혁은 서구식 근대 국가의 제도를 수용하면서도 조선의 전통 질서를 완전히 해체하지 않으려는 점에서 절충적 성격을 띠었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은 황제권 강화를 중심으로 하되, 신분제의 완화, 민권 의식의 확대, 그리고 경제 기반의 자립 등을 함께 도모하였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은 토지 소유권을 문서화하고, 국세의 징수를 합리화하기 위한 근대적 시도였다. 교육 부문에서도 기존의 성균관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신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기술학교 및 군사학교 등을 통해 실용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 외에도 철도, 전차, 전화, 광산 개발 등 근대적 산업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이 적극 추진되었다. 고종은 해외의 박람회에 대한제국을 출전시키는 등 국제 사회에서의 존재감을 높이려는 외교 전략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개혁들은 겉으로는 서구화를 지향하되, 그 중심에는 조선 전통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복합적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으며, 이는 유교적 질서와 충돌하지 않으면서 근대화를 모색하려는 고종의 전략이었다.
광무개혁은 일본의 압박과 내부 비효율성 속에 제도적 정착에 실패했다
광무개혁은 그 의도와 방향성에서는 근대적 요소를 상당히 포함하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여러 제약에 부딪혔다. 우선 대한제국의 재정 기반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각종 근대화 사업이 지속성을 갖기 어려웠고, 관리들의 부패와 무능, 지역 사회의 저항 등으로 개혁의 일관성과 실행력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장애물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외교권을 박탈하고 대한제국을 사실상 보호국화하였다. 이후 광무개혁의 대부분은 일본의 간섭 속에 무력화되거나 폐지되었으며, 고종 본인도 1907년 강제 퇴위당하며 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광무개혁은 근대화를 스스로 주도하려는 마지막 시도였지만, 내외의 조건이 성숙하지 못했고, 근대 개혁의 기반인 시민사회의 성장도 미비하여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단순히 조선의 몰락 앞에 무력했던 마지막 발악이 아니라, 주체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역사 속에 각인시킨 중요한 전환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