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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개혁과 쇄국 정책 - 조선 말기 체제 유지를 위한 절박한 선택

by HomeCareHacks 2025. 8. 21.

붕괴 직전의 왕권 회복을 위해 대원군은 강력한 개혁과 통제를 시도하였다

19세기 중반 조선은 내외의 혼란 속에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민란과 기근, 삼정의 문란으로 민심은 이반되었고, 왕실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하 대원군)이 섭정의 자리에 오르며,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과 왕권 회복을 목표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원군은 먼저 비대해진 세도 가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붕당 정치를 타파하며 정치 기강을 바로잡는 데 주력했다. 특히 안동 김씨 등 세도 가문 출신 인사들을 제거하고, 인재를 신분에 관계없이 등용하는 탕평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대동법의 시행을 강화하고, 경복궁 중건을 통해 왕실의 상징성을 회복하려 했다. 대원군의 이러한 정책은 일시적으로 조선의 국정 혼란을 정리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의 독단적 통치와 무리한 사업은 점차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외세와의 충돌 속에서 그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쇄국 정책은 외세의 위협에 대한 방어였지만 시대의 흐름과 충돌했다

대원군 집권기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외세에 대한 철저한 배척 정책, 즉 쇄국이었다. 그는 서구 열강과 일본이 조선에 무력을 통해 개항을 강요하자, 이를 조선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위협으로 인식하고, 국경을 폐쇄하고 서양 문물의 유입을 차단하려 하였다. 대표적으로 1866년 프랑스 선교사 처형과 병인양요, 1871년 미국과의 신미양요 등에서 대원군은 군사적 저항을 선택하였고, 정족산성과 광성보 등에서의 전투는 조선의 독립을 지키려는 상징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또한 그는 천주교를 ‘서양의 침략 도구’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박해를 감행하며 수많은 천주교 신자와 선교사를 처형하였다. 이러한 쇄국 정책은 한편으로는 조선의 자주성과 전통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기술 발전에 둔감한 대응이었다. 일본이 이미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시기에, 대원군의 조선은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되며 근대화의 흐름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원군의 쇄국은 단기적으로는 국가 체제를 방어하는 데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이 국제 정치에서 낙후되는 원인이 되었다.

대원군의 개혁은 체제 수호를 위한 보수적 근대화 시도였다

대원군의 정책은 혁신적인 개혁이라기보다는, 조선의 전통적 질서를 보전하고 붕괴를 막기 위한 보수적 성격이 강했다. 그의 경복궁 중건은 단순한 건축 사업이 아니라 왕조의 상징을 되살려 국왕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복원하려는 시도였으며,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암행어사 파견과 부세 개혁도 민생 안정보다는 체제 유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대원군은 서구의 근대화와는 다른 길을 택한, ‘전통을 통한 재정립’의 개혁을 추진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정책은 조선의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고, 특히 개항을 거부하고 세계 변화에 눈을 감는 폐쇄성은 훗날 일본의 침략과 조선의 식민지화로 이어지는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결국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며 대원군은 실각하고, 이후 조선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갈등 속에 근대화를 둘러싼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의 개혁은 위기의 조선에서 전통 권력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서, 조선 후기 정치사의 중대한 분기점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