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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등장과 사상 - 조선 말기 민중 종교이자 사회 변혁 운동의 출발

by HomeCareHacks 2025. 8. 21.

봉건 질서와 외세 침탈 속에서 동학은 민중의 절박한 호소로 태어났다

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양반 지배층의 부패와 수탈이 극심했고, 토지의 편중과 삼정의 문란은 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영향력이 조선을 압박하며 전통적인 세계관을 흔들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등장한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민중의 절박한 호소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열망이 결합된 사상 운동이었다. 최제우는 1860년 동학을 창도하며, 하늘에서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고, ‘시천주(侍天主)’ 즉 하늘을 모신다는 개념을 중심으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는 유교적 위계 질서와 신분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그 자체로 혁명적인 사유였다. 동학은 유·불·선의 전통사상을 융합하면서도, 민중의 일상 언어와 감정에 맞는 방식으로 신앙을 체계화하여 하층민 사이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조선 후기 민중 종교이자 사회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동학의 교리는 인간 평등, 자주 독립, 도덕 회복을 강조하는 실천적 이념이었다

동학의 핵심 교리는 단지 종교적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를 회복하려는 강한 실천성을 담고 있었다.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사상은 모든 인간은 하늘이며, 신분과 출신에 관계없이 존엄한 존재임을 의미하였다. 이는 조선 사회의 고질적인 신분 질서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급진적 선언이었다. 또한 동학은 ‘자력갱생’을 강조하며, 스스로의 도덕성과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였고,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조선의 주체성을 지키려는 자주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최제우의 뒤를 이은 최시형은 교단을 조직화하고 교리를 체계화하여 교세 확장에 기여하였고, 포덕, 교화, 수양을 강조하며 신자들의 일상 속 실천을 중시하였다. 그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의 경전을 통해 민중에게 쉽게 교리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며, 유교와 다른 점은 위정자 중심이 아닌 민중 중심의 도덕 실천을 강조한 점이었다. 이러한 동학의 교리는 당시 피지배 계층이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었고, 결국 농민운동과 결합되며 현실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동학은 갑오농민운동을 통해 민중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동학은 종교운동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중의 정치적 불만과 결합하며 변혁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탐관오리의 척결, 토지의 공정한 분배, 외세의 축출 등을 내세우며 조선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전봉준은 동학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현실 개혁의 기반으로 삼아,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주장하였다. 제1차 봉기는 전주성 점령과 폐정 개혁안을 실현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청과 일본이 조선에 개입하면서 외세와의 충돌로 번져 결국 무장 항쟁으로 이어졌다. 제2차 봉기는 일본군의 진압으로 좌절되었으나, 동학은 이후 의병운동과 개화파, 개혁세력에게까지 영향을 주며 새로운 민족 운동의 사상적 자양분이 되었다. 비록 동학은 그 운동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 이념은 이후 천도교로 계승되며 3.1운동을 비롯한 민족 독립운동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동학은 조선 말기 역사에서 단순한 종교가 아닌, 민중의 각성과 사회 개혁을 이끈 근대적 사상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