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명과의 사대관계를 통해 국제 정통성을 인정받고 내치의 안정을 꾀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새로운 왕조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교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 설정은 조선의 국제적 위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였으며, 조선은 자발적인 사대 외교를 통해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외교적 인정을 얻고자 했다. 이 사대 외교는 단순히 외교적 예속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 질서 속에서의 상호 인정 체계로 이해할 수 있으며, 조선은 이를 통해 내정의 안정을 도모하고 왕실의 정통성을 명문화하였다. 명과의 외교는 정기적인 사신 교환, 예물과 조공, 문화적 교류 등으로 이어졌고, 이는 조선의 관료제, 의례제도, 법률 등 다양한 영역에 명의 제도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명은 조선을 ‘동이의 모범’으로 평가하며 일정한 자율성을 보장했으며, 조선은 이를 기초로 유교적 문명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였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대명 외교는 정치적 실리와 문화적 자긍심을 동시에 추구한 전략적 외교의 결과물이었다.
여진족에 대한 조선의 정책은 회유와 무력 대응이 공존한 복합적 형태였다
조선 전기 동북방 지역은 여진족의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조선은 국경 안정과 통상의 유지를 위해 여진과의 관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태조 이성계 시기부터 여진족에 대한 회유와 정벌이 병행되었고, 세종 대에는 4군 6진의 개척을 통해 실질적인 국경선 확정과 방어 체계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윤덕, 김종서 등의 장군들이 활약하였으며,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군사적 거점을 마련함으로써 북방 방어를 공고히 하였다. 조선은 여진족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의주, 경원 등을 중심으로 무역소를 설치하고 관무역을 장려하여 회유책을 병행했다. 그러나 여진 내부의 분열과 자주적 성향, 그리고 조선의 통제 한계로 인해 여진과의 갈등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고, 이는 이후 후금의 등장과 병자호란 등으로 이어지는 장기적 갈등의 서막이 되었다. 결국 조선의 여진 정책은 단순한 적대가 아닌, 실리를 따지는 복합적 외교·군사 전략의 일환이었다.
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응은 해금 정책과 방어 체제 강화로 나타났다
조선 전기의 또 다른 중요한 대외 과제는 일본과의 관계, 특히 왜구 문제였다. 고려 말 왜구의 극심한 침입은 조선 건국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였고, 조선 정부는 건국 초기부터 해상 방어 체제를 정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태종과 세종 대에는 삼포 지역을 중심으로 제한적 교역을 허용하는 한편, 군사적 대비도 강화하였다. 세종은 이종무를 시켜 쓰시마를 정벌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 대응을 시도했고, 이를 통해 일시적으로 왜구의 침입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상 교역이 차단되면 오히려 불법 무역과 해적 활동이 증가하는 현실을 감안해 조선은 이후 제한적 교역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외교 전략을 수정하였다. 일본과의 외교는 삼포왜란, 을묘왜변 등 위기 상황을 거치며 점차 외교적 제도화가 이루어졌고, 이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과의 비교적 안정된 외교관계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이 외교와 국방의 균형을 추구하며 실리 외교를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조선 전기의 대외 정책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고려한 정교한 전략이었으며, 이후 조선 외교의 기본 패턴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