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단지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특정 집단이 스스로를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고 결속을 다지기 위한 정체성 형성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형성과 유지, 확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역사’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서술할 것인가, 어떤 인물과 사건을 기념하고 어떤 이야기를 강조할 것인가에 따라 한 민족의 정체성은 뚜렷이 구체화된다. 특히 19세기 유럽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등장하면서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은 국가 정당성과 통합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는 이후 세계 각지에서 독립운동, 식민지 해방, 국가 건설 등의 맥락 속에서도 반복되었다. 역사 교육은 국민을 ‘만드는’ 중요한 장치가 되었고, 박물관과 기념비, 역사 소설과 영화는 대중이 과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기억하게끔 이끌었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은 종종 역사적 사실을 선택적으로 구성하거나, 타 집단을 배제하는 논리를 포함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왜곡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본 글에서는 민족주의와 역사 서술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살펴보고, 민족이라는 개념이 역사적 산물이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더 포용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을 위해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민족은 언제부터 존재했는가 - 상상된 공동체와 역사 서술의 전략
오늘날 우리가 ‘민족’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근대 이후 형성된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 다수 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특히 베네딕트 앤더슨은 그의 저서 『상상된 공동체』에서 민족을 실제로 함께 만나본 적 없는 구성원들이 신문, 문학, 공교육 등을 통해 서로를 동일한 공동체로 ‘상상’함으로써 형성된 집합체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공동체의 형성을 위해 역사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 중세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왕과 귀족, 교회 중심의 연대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국민국가의 형성과 함께 모든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민족의 역사’가 필요해졌고, 이로 인해 과거의 사건과 인물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대의 왕국이나 부족 사회는 ‘민족의 기원’으로 포장되었고, 민족 서사에 부합하는 사건은 영광으로, 그렇지 않은 사건은 침묵 혹은 왜곡의 대상이 되었다. 예컨대 프랑스는 프랑크 왕국을 기원으로 삼고 대혁명을 공화국 정신의 출발로 삼았으며, 독일은 게르만족의 자유를 강조하고 로마 제국에 대한 저항을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한국의 경우에도 단군 신화와 고조선, 삼국 시대를 ‘한민족’의 시원으로 설정하며, 일제강점기를 통한 민족 수난 서사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역사 서술은 국민 통합과 자긍심 고취에 효과적일 수 있으나, 과거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다문화성, 계급, 성별, 지역 간 차이 등은 종종 간과되거나 배제되기 쉬웠다. 더불어 ‘우리’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동시에 ‘타자’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며, 이는 혐오와 편견, 역사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은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이며, 우리는 그 형성과 작동 방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결코 중립적이거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민족이라는 개념도 영원한 본질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하는 구성물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을 위하여
민족주의가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며, 이는 과거의 사건을 해석하고 기억하는 방식에도 깊이 관여한다. 특히 전쟁, 침략, 학살, 독립운동과 같은 극단적 경험은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며, 역사 서술은 이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위로하고 미래의 단결을 촉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역사 인식은 타 집단과의 갈등을 정당화하거나 고착화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하며, 역사 전쟁이나 기념일 갈등, 교과서 논쟁과 같은 현상으로 표출되곤 한다. 예컨대 동아시아에서의 위안부 문제나 난징대학살, 독도 영유권 문제 등은 단지 사실을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각국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한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의 역할은 단지 자긍심을 고양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과거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역사를 단일한 민족 서사로 환원하지 않고, 다양한 사회 집단과 개인들의 경험을 포용하는 다성적 서사를 지향해야 하며, 더불어 타자의 시선에서 자국사를 바라보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또한 민족주의적 역사 교육은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는 동시에, 역사적 갈등을 성찰하고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기억의 정치가 특정 서사만을 반복 재생산하는 구조라면, 우리는 망각 속에 사라진 이야기들을 의도적으로 발굴하고 복원함으로써 역사 인식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 민족주의는 때로 연대의 힘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배제와 혐오의 기반이 되는 순간 역사학은 그에 맞서 진실과 윤리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인식의 도구이며,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그 도구가 왜곡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