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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 - 주변부의 목소리를 찾아서

by HomeCareHacks 2025. 8. 16.

우리는 흔히 역사를 기록된 사실의 축적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훨씬 더 많고 깊이 존재해 왔다. 국가와 제국, 지배자의 업적이 역사서에 남는 동안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 여성과 아이들의 경험, 식민지 피지배자와 이주민의 고통, 소수민족과 하층민의 목소리는 공식적인 기록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러한 비가시적 경험들은 단순히 사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역사 서술의 권력이 중심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배제되었던 것이다. 무엇을 기록할 것인지, 어떤 이야기를 역사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언제나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역사는 종종 승자의 기록, 지배자의 서사가 되기 쉬웠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역사학의 지형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사회사와 구술사, 미시사, 젠더사와 탈식민사 등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하며, 기록되지 않았던 주변부의 목소리를 복원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기존 서사에 ‘덧붙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서술의 전제 자체를 문제 삼으며, 역사학의 민주화를 시도하였다. 본 글에서는 왜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주변부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다양한 역사학적 방법론과 시도들을 살펴보며, 우리가 지금 어떤 역사 감수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성찰해보고자 한다.

누가 역사를 쓰는가 - 권력, 기록, 망각의 정치

역사가들이 오랫동안 다루어온 전통적 사료는 주로 국가 기관, 교회, 군대, 혹은 상류 계층에 의해 생산된 것이었다. 이는 역사학이 성립된 초기부터 정치사, 외교사, 전쟁사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일상의 기록, 개인의 기억, 주변부 공동체의 경험은 가치 없는 정보로 간주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예컨대 고대 문명의 연대기에서는 왕과 귀족의 업적이 중심에 놓이지만, 당시 농민이나 여성, 노예들의 삶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중세나 근세 사회에서도 여성의 언어, 하층민의 노동, 이단자나 반체제 인사의 사유는 파편적으로만 존재하며, 그것마저도 왜곡된 시각으로 기술되곤 했다. 이러한 역사적 공백은 단순한 ‘모름’의 문제가 아니라 ‘지우기’의 결과이며, 권력이 자신의 서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편집한 구조적 결과물이다. 식민지 역사에서는 지배자의 기록이 중심이 되고 피지배자의 시선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전쟁의 역사에서도 군사 전략과 지도자의 판단만이 강조되고, 민간인의 피해와 감정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망각의 정치 속에서 진정한 과거는 오히려 침묵 속에 묻혀 왔으며, 이를 다시 불러내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이 수행해야 할 가장 윤리적인 작업 중 하나이다. 이 과정에서 구술사나 미시사는 단순히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는 작업이 아니라, 어떤 사료를 역사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기준 자체를 전복하고, 기록되지 않은 자들의 삶이 단지 '주변부'가 아니라 역사 자체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학은 이제 더 이상 권력의 언어만을 번역하는 도구가 아니라, 억압되고 침묵당했던 목소리를 해방시키는 해석의 공간으로 거듭나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기억의 정치성과 망각의 구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변부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역사학의 시도들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접근하기 위해 역사학은 다양한 방법론적 전환을 시도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구술사이며, 이는 문자 기록이 없는 집단이나 인물의 경험을 인터뷰와 증언을 통해 수집하고 분석하는 방식이다. 특히 여성사, 이주사, 장애사, 전쟁 피해사 등에서 구술사는 단순히 사료를 보완하는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 서술의 원천이 된다. 예를 들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경우, 피해자들의 증언은 오랜 시간 동안 공식 사료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구술사를 통해 그들의 기억은 공적 담론으로 부상하였고, 이는 국가와 국제사회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냈다. 또 다른 사례로는 미시사(microhistory)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거대한 구조나 사건이 아닌 한 개인, 한 마을, 한 문서에 집중함으로써, 주류 역사 서술에서 간과된 미세한 경험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대표적인 사례인 ‘치즈와 구더기’는 16세기 이탈리아의 방앗간 주인 메네키오의 종교관을 통해 당시 민중의 세계 인식을 조명한 작품으로, 미시사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보여준다. 탈식민사 역시 중요한 흐름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던 지역의 자율적 기억과 시선을 복원하며, 서구 중심의 역사 패러다임에 도전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단지 학문 내부의 논의에 그치지 않고, 교육, 미디어, 박물관 전시, 시민사회 활동 등과 연결되며 공공 역사(public history)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오늘날의 역사학은 더 이상 단일한 내러티브를 제시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수의 서사들이 공존하고 긴장하며 충돌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이는 역사란 고정된 진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다시 말해지는 이야기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주변부의 목소리는 바로 그러한 유동성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역사는 기억과 망각, 중심과 주변의 균형 위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며,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 과거야말로 지금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설명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열쇠가 될 수 있다.